만허당 법일스님 행장

 

1904823().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출생(1).

1936915. 지리산 대원사에서 문성文成 스님을 은사로 출가(33).

193799. 영암映岩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34).

1940. 대원사 강원 대교과 졸업(37).

195048. 해인사 효봉嘵峯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47).

1953. 대구 동화사 비구니총림 교무국장 역임(50).

19539.조계종 중앙종회의원 피선(50).

1954. 운문사 비구니강원 교무국장 역임(51).

19554. 수선안거 30하 성만(52).

195595. 대원사 주지 부임 이후 40여 년간 대원사 중창불사(52).

1982. 3회 단일계단 구족계 존증아사리 역임(79).

1983. 4회 단일계단 구족계 존증아사리 역임(80).

19911010(),세수 88세 법랍 55세로 입적(88).

 

 

적유해동남악寂惟海東南岳을 지리산 방장산 두류산이라 부른다. 

두류는 백두산의 지류라는 맥락으로 유사(儒士)들이 붙인 이름이요. 지리와 방장은 만수의 백련난화 속에 유마거사의 불이법문을 상설하는 대승수행도량을 각인함이니 신라 삼법, 대비, 양대 화상이 육조정상을 모시고 이 도량에 주석하시다가 다시 쌍계사로 옮겨 평지탑을 모셨다는 동래설이 있고 보면 방장 지리는 신라 선승들이 처음으로 붙인 도량임을 세월의 풍연 속에서 감지 할 수 있다. 거연히 남악을 중심으로 대가람 수십 개가 건립되었으나 대원사는 가장 깊은 역사를 지닌 웅장한 가람이었다. 사지를 안찰 해보면 천왕봉 하에 눌러 앉아 준령에 노송과 거죽의 천저들이 도량의 좌우를 수정전이나 에워싸서 선경죽원정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천왕봉은 곧 지리산의 정령이다. 남록으로 당학이 통할하여 백도의 청천과 만절의 경간이 여울에 떨어지고 다투어 쏟아 부어서 사루전을 면전해 질주하니 가이可以 일곡 창주라 할 수 있다. 곤곤히 하천을 따라 곡구를 탈거(脫去:골짜기를 벗어남)하면 천정의 옥야에 세찬 청류를 개탁하니 속칭 덕산동이다.

 

협중에 평야 삼십 여리가 열려 신구의 촌락을 이루어 흐르는 계곡 수 맑기가 서촉의 금강과 다름이 없다. 동으로 산음의 환아정을 바라보니 산을 배알하는 경파에 남색의 창천이 잠기고 서방은 화계곡 쌍계사를 둘러볼 수 있으니 어느덧 청학고운에 명월이 솟는다. 남으로 감상의 촉석루를 가르치나 황연과 교우가 묵연히 앞을 가로막으며 북록으로 위성의 벽송암을 이웃하여 새벽 범패와 저녁 쇠북을 듣는듯하여 사람의 심성을 각성케 하니 이것이 대원사의 지리적 위치다. 사지초장은 신라 진흥왕 무진 서기 548년에 연기조사가 필로를 열어 초창하고 평원사라 불렀지만 이후 천여 년 동안 흥폐를 알 수 없고 평원사라고 후세에 전할 뿐이다.

 

1724년 경종 갑진에 멸암태흠선사가 계상의 여래사리탑을 수선하니 이탑은 신라 선덕왕 15년 병오에 자장율사가 세웠다. 조선불교통사 불조유골동래설에 운하되 지리산에 3탑이 있는데 대원사탑이 동탑이요 법계사탑이 중앙탑이요, 구례 화엄사 삼층탑이 서탑이다. 기이하게도 년중 2회씩 삼탑에서 나온 상서로운 방광이 허공에서 상봉하여 오색 무지개 빛을 휘황하게 발산한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는 세존 사리가 동근일체요, 지리산 전체가 불신이란 것을 증명하는 크나큰 의미이다. 1784년 정조 갑진에 혜월옥인선사가 탑을 보수하면서 사리72과를 얻으니 대과는 녹두만 하고 소과는 가장 알 만 한데 오색이 영롱하였다.

 

기단을 정돈하고 탑의 357층에 분봉하였다. 1870년 고종 경인에 근세 선장인 구봉혜흔 선사가 암자가 경퇴하여 객중에 부족함을 개탄하고 전과 루를 크게 중건하니 서에는 조사영당을 보수하고 동에는 방장실을 건립하여 대원사라 개칭하고 국내의 존숙을 초빙하여 탑전에는 좌선하고 방장에서는 간경 하여 선교를 쌍수 하니 전국의 납자들이 문풍운집聞風雲集하여 대법회를 이루니 선객이나 학인들로써 대원법회를 거치지 아니한 이는 사문의 유감遺憾으로 생각하였다.

 

1914년 갑인12일밤에 실화하여 전사가 초토가 되어버리니 이 무슨 화마의 업풍인가! 주지 만하영태와 화주 포담 영암 만성과 동역에 영허 세일 원익 기원의 오십여 인이 구물을 부흥하기로 서불맹심하여 혹은 사재를 다털기도 하고 수족이 부르트도록 사방다문을 두들려 익년3월에 토목역을 시작하여 사한서를 지나 정사 추에 낙성을 고하니 전루당각과 료주창고가 순서대로 건흥되어 무려 12184칸이니 간가間架가 치밀하고 계정이 회활하여 전 규모보다 배나 하였다.

 

그러나 또한 40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마의 희롱으로 1948년 무자 1월에 여수에 주둔하던 부대의 공산분자 선동과 반란 여파로 또 다시 전사가 겁회로 돌아가 도장이 황량하기 그지없더니 연이어 동족상잔의 6.25가 터져 이 계곡에 시신의 악취와 제반통제로 사람들이 끊어졌다. 도장이 폐허로 방치된 지 어언 팔년 유수 1955년 을미9월에 비구니 법일화상이 주지로 임명되어 수난의 연속 속에 4중창의 원력으로 겁회를 소제하고 제자들인 행원 성우 행돈 행석 송벽 등과 먼저 탑전을 짓고 근근히 복구 불사를 시작하려는데 당시 종단이 비구 대처 시비중이라 기득권을 가진 구기인의 방해로 소송까지 제기되어 불사가 중단되더니 1959년 을해에 주위사람들의 도움으로 고등법원에서 승소하는 등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중에 일정한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니요 불사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신도도 없었다. 시주할 사람을 찾아 동리를 헤매다보면 산중험로에 교통편도 없어 황포에 야숙도 하고 추원겨울엔 동상 걸린 발을 싸매어 걷기도 하고 여름엔 얼굴이 검게 타는 두타행으로 시주문을 두드리니 그 신심에 감복하여 내놓은 사전과 전답을 받아 한 채 지을 지금이 생기면 한 채를, 두 채 지을 시재를 얻으면 두 채를 지으면서 40여 년동안 가리풍우에 씻기고 돌에 치이어 사리전, 선원, 대웅전, 천광전, 원통전, 사신각, 봉상루, 명부전, 다시 사리전, 선원, 개건 등 범17여동320평으로 도장을 장엄하니 사양이 일신되었다.

 

또한 경내의 9층 석탑은 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대원사의 얼굴이다 오랜 풍연과 전화로 탑신이 기울고 마멸된 것을 1989년 신미7월 지방유형문화제 30호로 지정됐던 것을 다시 1992년 보물 1112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법일화상은 한양산으로 1904823일에 거사 김유찬 청신녀 김씨사이에서 장녀로 출생했으며 부덕한 집안에서 유시에 정훈교육을 받았으며 개화기 신여성으로 경기여고를 거쳐 동덕여고에서 졸업을 했고 외가를 따라 진주에 내려와 진주 식산은행에서 수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성품이 강직하고 순수했으며 남달리 남자처럼 주장과 의기가 고집스러워 세속적 불의와 타협을 거부했다. 어느 날 홀연히 부세浮世의 살림살이가 출가하여 구도함만 같겠는가?’ 라고 결심하고 1937년 정축에 대원사로 입산했다. 다음해에 영암화상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았고 1940년 경인에 영암화상으로부터 대원사에서 대교를 수료했고 1953년 계사에 해인사 효봉스님으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다시 2년여 사이에 동화사 비구니 총림과 운문사 강원 교무국장을 역임했으며 중앙종회의원으로 파선되어 수 년 동안 비구니승가교육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천년고찰의 화마겁회를 쓸어내고 도량을 일신 중창하여 니승선尼僧禪도장 꾸미니 조석으로 죽비소리에 불조 혜명을 후손에 전하고 장부사 마친 것 인가. 1991년 신미 음력 1010일 밤 구구낙엽 속에 시적의 조종이 산사에 울리니 세수는 88이요 법랍은 54이다. 금년 하절에 총무 대경 학승이 상경하여 대원사 사적비문을 청하기에 문사가 단졸 하여 사양도 했건만 나 또한 평소 법일 화상을 양모한 처라 기연의 우연이 아님을 흔행으로 여겨 근건한 심정으로 붓을 잡았다. 한편 나의 노사 고봉강백께서도 대원사 방장실 강석에 향화 인연이 계셨던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문헌이 있는 데로 우에 녹錄하고 몇 마디 새김을 올리노라.

 

유마의 불이속에 문수의 백련은 꼭지채로 떨어져 대중 무릎에 쌓이고 덩그런 빈산에 청학의 울음으로 황금의 담장에 백옥계가 열림이여! 천왕의 문턱에 연기조사의 석장소리! 천년의

 

유수 포표 한 풍연 속에 기송을 어디에 물어볼꼬! 화마가 할퀸 도량 구층 탑신 붉게 물드니 청태 속 숨은 한이 옥생으로 선을 뽑아 그 몇 번 상서 방광으로 허공계를 물들였나!

 

불장암에서 운집한 승빈 탑전에 울린 죽비소리 방장탑하에 간경소리 구봉의 단주소리 영이남 제일의 수행도장이었다. 명호라 중생의 업화인가 미망인가. 만하화상의 삼창으로 환연일신 한 가람이 동족 반란의 불길로 만학의 초토가 되니 그래서 천왕여신은 동방으로 법일화상을 불렀는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설산의 백두 걸음으로 때론 호호로 대중을 일깨워주고 구할 것도 얻을 것도 없는 본분 두차행에 48년 중창 니선도장을 장엄하여 불조혜명을 후곤에 정하니 장부나 마친 것인가! 빈 방에 홀로 앉아 옹이 맺힌 수족 어루만지면서 껄껄 한바탕 미소 짓고 청정한 법신으로 마야 품에 회귀하니 아아 화중지연화여 우갱우장于羹于墻에 비친 그 모습 물소리 바람소리 낙엽소리 새소리 법일화상의 공음이로다. 복원 하노니 자차이후로 진풍이 불식하고 혜거가 장명하며 겁겁화수풍제를 타방억만계에 날려버리고 서광이 항상 일어나며 불일이 보조 하소서.

 

 

불기 2541년 정축 양 복월 고봉문손 일해 덕민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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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리산대원사